Culture/Book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e) - 에리히 프롬

sleepiggy 2016. 7. 14. 22:23

내가 정말 제일 좋아 하는 책. 


오래전에 썼던 독후감을 찾았다.
두번째로 독후감 경진대회에 출품했던 건데, 첫번째 대회에서 고배를 마시고 수상작들을 읽어보았었다.
독후감에 어떠한 포맷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음 경진대회에 출품한 독후감 이였다.
제일 좋은 상을 받게 되었고 매우 두둑한 상금까지 받아서 친구들이랑 신나게 외식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 단순히 책읽는것만 좋아했던 나로서는 이 상이 너무나 감사했다. 
그 이후로 더 책을 좋아하게 된 것 같고,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큰 상을 받아봐서 행복한 기억이 가득한 책이다. 
그리고 이 독후감도 가끔 생각나서 읽어보는데 언제 읽어도 좀 잘쓴듯....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에의 탈출


'혼자'라는 것은 매우 편리하다.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며, 그 때 그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좋은 '혼자'를 만끽하며 편리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문득 '혼자'라는 것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할 누군가를 찾는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외롭지 않기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함께'를 선택하지만 역시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닫게 된다. 이것은 '혼자'와 '함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럼 이 외로움의 근원은 어디 있는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책의 도입부에서 이 외로움. 즉 자신이 혼자 분리된 것에 대한 불안에 관해 말한다. 인간은 동물계에서 즉 본능적인 적응에서 벗어났으나 자연을 결코 떠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인간적인 조화, 개인적인 삶을 초월한 합일을 통해서만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고립이라는 것에 대해서 항상 불안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고립이라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고립되지 않도록 하면된다. 즉 혼자가 아니라 무엇인가와 함께이면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것인가? 그저 함께하면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함께'가 아니라 정신적인 유대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을 하지만, 고립감을 해소하는데 실패하고 이번에는 성공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으며 또 다른 상대을 찾아 헤매이는 행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의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기술'의 문제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나 역시 주위에서 수많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과연 사랑하는 상대가 바뀐다고 해결이 되는것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장하여 그 사람을 나의 이상향에 맞추고자 하고 얕은 이해로 상대와 진정한 교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떠한 노력도 없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자 하지만, 사랑 또한 '기술'이기에 우리는 그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근원적인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성공적인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 아니라 '참여하는 '이다' (40)

 
여기서 말하는 '활동'라는 개념은 책의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인데, 이 '활동'이란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게으르거나 귀찮은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인식을 하고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즉, 스스로가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랑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어떻게 하면 남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 선물, 칭찬, 관심, 그 어떤 것이든 주는 것에 인색하다. 주는 것은 나의 어떤 것을 잃게 되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남에게 줌으로써 나의 생동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을 느끼는 것이 자신에게 행복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베풀면서 만족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베품으로써 상대가 기뻐하는 것을 느낌으로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산한 것에 대한 과시적 기쁨, 즉 스스로의 만족감을 통해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 주는 것에 대한 진정한 기쁨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은 사랑에 대한 수동적인 관념을 능동적으로 바꾸게 하고, 주는 것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아주 신선하다. 또한 이를 통해 나의 무언가를 남에게 준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게 해 준 데 큰 의의가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실천' 장에서 항상 '빨리빨리'를 추구하며, 시간이 아까워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항상 이것저것 산만하게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현대인은 잃는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그가 얻은 시간을 그대로 허비하는 외에는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150)

 
우리는 언젠가부터 '빨리빨리'를 추구하면서 시간을 아끼는데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효율이라는 것에 강박감을 가지며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것을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코와 입을 이용하고 눈으로는 티비를 보며 음식을 먹고 마신다. 그러나 그리하여 모인 시간들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그리하여 보낸 시간동안 얻은 것은 무엇인가? 무엇하나에 집중 하지 않았기에 나중에 남는 것은 어줍잖게 보낸 시간과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가에 대한 허무 뿐 이다. 그렇게 모은 시간 또한 우리는 소비에 목마른 사람처럼 입을 벌려 오락, 음식, 지식을 닥치는 대로 마구 삼키고 있다. 사랑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상대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상대의 생각에 집중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에 나의 정신과 의식을 집중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하면 이러이러 하여야 한다.'하는 말에 강박감을 갖고 깊이 상대에게 다가가지 않은 채 단순하게 감정을 소비한다. 그런 사랑 후에 남는 것은 허무와 다시 느끼게 되는 고독 뿐 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사랑 할 때 상대에게 집중하며 사랑을 하는 그 순간과 자체를 여유로운 것으로 느껴야 한다. 여유는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든 내 마음속에서 내가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리히 프롬이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의 조건으로 말한 것은 '개성'이다. 에리히 프롬은 개성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랑' '개인의 통합성,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 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남는다는 역설이 성립된다.'(38)

 
우리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그것이 옳은 것이고 자신의 불구개성을 나타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희생하거나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또한,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서 사랑하는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 또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는 모두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나'와 '너'의 차이를 알고 이해하며 각자가 각자의 상태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개성과 잣대를 잃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의 그 자체를 사랑 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을 그저 외로움을 달랠 안식처 정도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사랑의 기술이니 실천이니 하는 것들에 시간을 할애 하는 것이 아까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일 처럼 '사랑' 또한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즉 우리의 고독감의 근원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랑은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사랑의 '기술'과 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삶 전체에 대한 생각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